전에 다섯 번 실패한 기록을 올렸는데, 그 뒤로도 계속 실패했습니다. 이제 세어 보니 스무 건쯤 됩니다.
그런데 쌓아 놓고 보니 무작위가 아니었어요. 같은 실패가 반복됩니다. 이번엔 유형별로 정리해 봅니다.
가장 흔합니다. 모델은 피사체를 잘 보이게 하려고 하고, 화면을 예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 본능이 제 지시를 이깁니다.
림라이트를 요청했는데 정면광이 나왔습니다. "뒤에서만 비춰라"라고 분명히 적었는데도요. 모델 입장에서는 앞이 안 보이는 게 실수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85mm에서 얼굴까지 흐려진 것도 같은 계열입니다. "배경이 흐리다"를 화면 전체의 스타일로 받았어요.
저채도를 요청했더니 대비까지 같이 빠져 화면이 하얗게 날아갔습니다. 채도와 대비가 모델 안에서 한 덩어리로 묶여 있는 모양입니다.
처방: 원하는 것 대신 없어야 할 것을 적습니다. no fill light at all, ONLY the background is out of focus, NOT washed out. 이 유형은 부정문 없이는 거의 안 넘어갑니다.
이게 제일 신기한 유형입니다. 어떤 단어를 쓰면 그 옆에 붙어 있는 다른 뜻이 같이 옵니다.
"나른한 오후 교실"이라고 썼더니 음산한 폐교가 나왔습니다. 나른함 옆에 쓸쓸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어제 또 당했습니다. "40년 된 이발소"를 요청했더니 버려진 폐허가 나왔어요. 벽지가 다 뜯기고 유리가 깨진 가게가요.
두 번 겪고 나니 규칙이 보입니다. "오래된"은 "버려진"과 붙어 있습니다. 학습 데이터에 오래된 것을 찍은 사진이 대개 폐허 사진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처방: 낡음을 요청할 땐 관리되고 있다는 걸 따로 적습니다. STILL OPEN AND IN DAILY USE, clean, maintained and working, NOT abandoned, no peeling paint, no dust. 세 겹으로 막고서야 됐습니다.
"성냥을 긋는다"라고 썼는데 처음부터 불이 붙은 채로 시작했습니다. 영상 모델은 시작 상태를 안 적으면 클라이맥스부터 그리려는 경향이 있어요.
처방: 첫 문장을 시작 상태에 씁니다. A wooden match STARTS COMPLETELY UNLIT with no flame anywhere in frame.
파도 조율사입니다. "기둥 근처 파도는 정연하고 멀어질수록 흐트러진다"가 이 그림의 전부였는데, 그걸 긴 문장 중간에 끼워 넣었더니 거의 반영이 안 됐어요.
처방: 핵심 대비는 독립된 문장으로 떼어 냅니다. 문장이 짧을수록 강해집니다.
1930년대 아르데코 포스터를 요청했더니 그 포스터가 액자에 담겨 방에 걸린 사진이 나왔습니다. 시대 양식이나 인쇄물을 요청하면 종종 이럽니다.
처방: the illustration IS the whole picture, NOT a photograph of a poster, NOT framed, no room visible. 매체 자체가 화면 전부라고 선언합니다.
초인종 앞에서 멈춘 손인데 초인종이 아예 안 나왔습니다. 손만 벽에 닿아 있었어요.
유리 가면도 그랬습니다. "입 없음"을 요청했는데 입이 생겼고, 유리가 아니라 청동이 됐어요.
처방: 없는 것이 주인공일 때는 그 사실을 선언합니다. The gap between fingertip and button is the subject of the photograph. NO MOUTH AT ALL을 세 번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아지랑이입니다. 프롬프트를 아무리 다듬어도 안 됩니다. 아지랑이는 계속 변한다는 사실 자체가 정체라서, 한 장에 담으면 원리상 흐릿한 얼룩이에요.
처방: 고치지 말고 매체를 바꿉니다. 영상으로 옮기니 한 번에 됐습니다.
마지막은 정직하게 적습니다. status: failed로 끝나고 아무 설명도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타줄 진동 3회, 거꾸로 흐르는 폭포 2회, 반딧불이 1회.
응답을 열어 봐도 오류 항목이 전부 비어 있어서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폭포는 표현을 바꾸니 통과했어요 — "물이 위로 흐른다"(현상 설명)는 두 번 실패했고, reverse-playback footage, played backwards(촬영 방식)는 한 번에 됐습니다. 정황이지 증명은 아닙니다.
기타줄은 끝내 못 만들었고, 소리굽쇠로 소재를 바꿔 우회했습니다.
스무 번 넘어지고 나서야 목록이 됐습니다. 여러분의 실패도 여기 어딘가에 들어갈까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아홉 번째 유형이 있을까요 🍠
이 글을 쓴 뒤에 새 유형이 하나 나왔습니다. 별바다 님의 조각 시리즈에서 밀랍상 한 장이 NSFW로 거절됐어요. 고전 조각 문법으로 쓴 프롬프트였는데도요.
흥미로운 건 같은 프롬프트로 만든 다른 여덟 장은 전부 통과했다는 겁니다. 모델마다 기준이 다릅니다.
처방: 판정을 다투지 말고 조건을 바꿉니다. 이 경우엔 형상에 긴 옷을 입혔더니 통과했고, 결과적으로 옷 주름이 밀랍의 손자국과 잘 어울려서 원래 계획보다 나아졌습니다. 자세한 건 별바다 님 글에 있습니다.
목록에 한 줄 더합니다 — 9. 안전 필터에 걸렸나 → 모델을 바꾸거나 조건을 바꿉니다.
[2026-08-08 추가] 이 유형은 사례가 더 모여서 따로 정리한 글로 옮겼습니다. 실제 API 응답, 왜 생기는지에 대한 가설, 넘어가는 여섯 가지 방법,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적었습니다.
[2026-08-09 추가] 유형 9의 메커니즘을 공개 연구로 확인한 글도 올렸습니다. 필터가 왜 맥락을 못 읽는지, 왜 모델마다 다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