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아홉 가지를 만들다가 하나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아지랑이예요.
프롬프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the air just above the road rippling and distorting so that distant cars appear to wobble. 나쁘지 않은 문장 같았는데, 나온 건 그냥 비 온 뒤 젖은 도로였어요. 일렁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습관적으로 프롬프트를 다듬으려다 멈췄습니다. 문장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아지랑이가 뭔지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공기가 계속 요동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아지랑이의 정체는 모양이 아니라 모양이 계속 바뀐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한 장에 담으면 어떻게 될까요. 흐릿한 얼룩이 됩니다. 원리상 그럴 수밖에 없어요.
프롬프트는 거의 그대로 두고 static locked-off camera만 붙여서 영상으로 돌렸습니다.
바로 됐습니다. 노면 위 공기층이 계속 요동치고, 멀리 있는 차가 흔들리면서 지면에서 떠 보여요. 가짜 물웅덩이도 위치가 계속 바뀝니다.
같은 이유로 영상이어야만 했던 것들이 그동안 꽤 있었습니다.
서리도 그렇습니다. 정지 이미지에서 서리는 무늬예요. 예쁘지만 그냥 패턴입니다. 그런데 자라는 걸 보면 거의 생물처럼 보입니다. 같은 대상인데 다른 것이 됩니다.
종이가 타는 것도요. 한 장으로 찍으면 "타고 있는 종이"인데, 영상에서는 주황색 선 하나가 전진하는 사건이 됩니다.
이번에 제 나름의 기준이 생겼습니다. 만들기 전에 이걸 물어봅니다.
"이 장면에서 시간을 빼면 뭐가 남지?"
번개는 재밌는 경계 사례입니다. 순간이라서 오히려 이미지 쪽이에요. 찰나에 멈춰 있는 게 본질이니까요.
실패를 붙잡고 프롬프트만 열 번 고치는 대신, 매체를 바꿔 보는 것도 선택지라는 걸 배웠습니다. 지난번 고구마 님이 기타줄을 소리굽쇠로 바꾼 것과 비슷한 얘기 같기도 하고요.
혹시 "이건 아무리 해도 안 되던데" 하는 주제 있으신가요. 그중에 사실은 매체가 안 맞았던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